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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화학이야기

주기율표의 역사 (3) 모즐리가 밝혀낸 원자 구조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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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글]

243.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 https://stachemi.tistory.com/243

 

주기율표의 역사 (2) 멘델레예프의 주기율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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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 모즐리가 발견한 원자의 구조

  1900년대 초반, 영국 맨체스터대학에는 훌륭한 과학자가 여럿 있었다.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있다. 러더퍼드 밑에는 다양한 성격의 유망한 제자들이 많았는데, 헨리 모즐리(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7-1915)도 그들 중 하나다.

X-ray 튜브를 들고 있는 모즐리 [출처] History of Science Museum, University of Oxford

 

  헨리 모즐리는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 존경했던 생물학자인 H. N. 모즐리의 아들이었지만, 생물학보다는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쉼 없이 연구만 하는 그다지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하루 15시간씩 꼬박 연구하면서 야채샐러드와 치즈로 끼니를 때우며 버텼다.

  처음에는 러더퍼드와 방사능에 대해 연구했지만 모즐리는 오히려 X-선에 관심이 더 많았다. 러더퍼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원자(대부분 금속)에 전자총을 발사하는 방식으로 원소를 연구하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X-선보다는 방사능 연구에 자신 있었던 러더퍼드는 당시, X-선 결정 구조 분석으로 유명했던 물리학자인 윌리엄 헨리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를 소개해줬으며, 모즐리가 X-선 연구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 어니스트 러더퍼드와 관련된 이야기 링크는 더보기에서

 

모즐리의 실험 장치 [출처] Oxford University, History of Science Museum, https://www.hsm.ox.ac.uk


  원자에 강력한 에너지의 전자총을 발사하게 되면, 원자 내부(안쪽 껍질)에 깊숙히 위치해있던 전자가 원자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때 튀어나간 전자로 인해 원래 자리에는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매우기 위해 바깥쪽(바깥 껍질)에 위치하던 전자들이 원자 내부로 몰려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높은 에너지의 X-선이 나온다. 모즐리는 이 때 발생하는 X-선의 파장과 원소들의 번호 사이에 수학적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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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9년 멘델레예프가 최초로 주기율표를 발표하고, 이후 몇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원소들이 추가되던 시기였다. 기본적인 주기율표의 배열은 가벼운 원자에서 무거운 원자 순서였는데, 몇몇 자리는 원소의 고유 성질과 주기성에 맞게 자리를 바꿔 주어야 했다. 그러나 원자량의 순서와 주기율표의 순서(원자번호)가 왜 다른지, 그러한 순서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물리적인 설명 체계)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예를 들어 금속 코발트(27Co)와 니켈(28Ni) 원자량은 거의 비슷했다. 코발트가 58.93, 니켈이 58.69이었는데, 니켈이 아주 약간 더 가볍기 때문에 기존 방식대로 원자량에 의존하여 배치한다면, 니켈이 주기율표 앞쪽에 위치해야 했다. 하지만, 모즐리의 X-선 스펙트럼 결과에서는 코발트와 니켈의 순서가 왜 그러해야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났다.

X-선 스펙트럼 [출처] H.G.J. Moseley, "The High Frequency Spectra of the Elements"; Philosophical Magazine 26 (1913): Pl XXIII.


  이러한 주기율표 순서(원자 번호)에 대한 기준을 25세의 모즐리가 제시한 것이다. 모즐리의 실험 결과는 원자 번호가 원자 내부의 구조(양성자 수)를 바탕으로 결정된 값이라는 사실 또한 보여준다. 모즐리는 연속적인 원자 번호의 원소들은 정확하게 1씩 차이나는 핵전하를 갖는다고 가정했고, 이를 오름차순으로 정렬하여 번호를 붙여서 당시 원자 번호를 재정의했다.

  모즐리는 43번, 61번, 72번, 75번 자리에서 간격이 발생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미지 원소의 존재를 예측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국 발견되지는 않았다.

X선의 진동수와 원자 번호의 관계를 나타낸 그래프 [출처] H.G.J. Moseley, "The High-Frequency Spectra of the Elements, Part II," Philosophical Magazine 27(1914): 709.


  러더퍼드가 알파입자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핵의 존재를 보였음에도 이를 믿는 이가 드물었었다는 시대적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모즐리의 업적은 더욱더 대단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2.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모즐리는 뛰어난 핵과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체적인 업적보다 안타까운 뒷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1914년, 모즐리가 맨체스터에서 옥스포드로 옮겨 물리학 연구를 계획하던 중,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모즐리는 가족과 친구, 영국 육군까지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입대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모즐리는 1915년 갈리폴리(Gallipoli) 전투에서 통신기술장교로 투입되었으며, 8월 작전 중에 저격수의 총에 맞아 2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 갈리폴리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이 러시아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독일 동맹국이었던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 상륙을 위한 전투였는데, 대규모 사망자를 낸 최악의 전투로 알려져있다. 이 전투의 실패로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갈리폴리 전투 [출처] commons.wikimedia.org


  다수의 전문가들이 1916년 모즐리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전쟁으로 인한 그의 죽음은 더욱 아쉬움을 키웠다. 이후 모즐리의 스승인 러더퍼드는 과학 인재들이 전쟁터에서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닌, 과학 연구를 통해 나라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영국 의회에 건의했으며, 적극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오늘날의 이공계 대체 복무 제도, 과학기술자 병역 특례 제도가 되었다고 한다.

 

 

모즐리가 밝혀낸 원자 구조의 비밀  - 끝 -

 


 

[참고한 자료]

[1] 샘 킨(2011), 사라진 스푼, 해나무
[2] https://www.degruyter.com/document/doi/10.1515/ci-2019-0205/html
[3] https://en.wikipedia.org/wiki/Henry_Mose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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