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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화학이야기

전자의 스핀 (feat.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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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의 스핀 (feat.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1. 슈테른 게를라흐 실험(Stern-Gerlach Experiment)

  192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오토 슈테른(Otto Stern, 1888-1969)과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는 원자의 각운동량이 양자화되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했다. 슈테른은 이론물리연구소 소장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의 조교였고 게를라흐는 실험물리연구소 조교였지만,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좋은 연구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이론물리학자와 실험물리학자의 협업이 생소한 일은 아니었다.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기념 동판 [출처] commons.wikimedia.org @Gedenkplaat van het experiment


  당시 학계에서 주목했던 보어 원자 모형은 음전하의 전자가 양전하의 원자핵 주변을 회전하는 구조를 갖는다. 보어의 모형이 이전 러더퍼드 모형과 구분되는 대표적인 차이점은 전자가 회전할 수 있는 궤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놀드 조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보어 모형을 보완하는 타원형 궤도를 제안했지만, 전자가 특정 궤도에서만 회전한다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즉, 보어-조머펠트 모형에 따르면, 특정 궤도에서만 회전하는 전자의 궤도 각운동량은 양자화되어 있고, 전자 공간도 양자화되어 있다.

보어-조머펠트 원자 모형 [출처] commons.wikimedia.org @Bohr-Sommerfeld Model


  슈테른과 게를라흐의 실험은 이러한 보어-조머펠트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검증 실험이었는데, 슈테른의 이론적 아이디어가 게를라흐의 기술적 역량을 만나 실현된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실험은 원자 공간(각운동량) 양자화를 검증한다는 당초 목적과 달리, 현재에는 전자스핀 개념을 뒷받침하는 실험적 증거로 소개되고 있으며, 파울리가 제안했던 네 번째 양자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언급되는 대표 실험이 되었다.

[출처] YouTube, La Physique Autrement , https://youtu.be/rg4Fnag4V-E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중성 원자가 불균일한 자기장을 통과할 때, 휘어지는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원자 각운동량의 양자화를 확인하고자 했다. 알짜 전하를 갖는 입자(전자나 이온)는 외부 자기장에 의해 직접 영향받아 휘어짐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실험에서는 전기적으로 중성인 원자를 사용해야만 했다.

  만약, 발사된 원자가 회전하는 고전 입자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한다면, 자기장 안에서 자기 쌍극자에 작용하는 힘 때문에 세차 운동을 한다. 입자가 균일한 외부 자기장을 통과할 때는 자기 쌍극자 양 끝에 작용하는 힘이 상쇄되어 휘어짐 없이 똑바로 진행하지만, 외부 자기장이 불균일하면 자기 쌍극자 양 끝에 작용하는 힘이 달라 휘어짐이 발생한다.

  슈테른은 불균일한 자기장에서의 원자 휘어짐 경향을 통해 보어-조머펠트 가설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발사된 원자가 모든 방향에 대한 각운동량을 가질 수 있다면(그들의 가설이 틀리다면, classical prediction), 발사된 모든 원자들이 제각각 다른 정도로 휘어지고 결과적으로는 스크린에 연속적인 띠 형태의 분포를 보일 것이지만, 각운동량이 양자화되어 있다면(가설이 맞다면), 원자들의 휘어짐은 특정 몇 군데 방향으로만 가능하여 스크린의 흔적도 제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출처] commons.wikimedia.org @Stern-Gerlach Experiment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은(silver, Ag) 원자를 사용하여 실험했다.
자기장 세기를 0 부터 점차 증가시키면서 은(Ag) 원자가 어떻게 휘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외부 자기장이 0일 때(외부 자기장이 없을 때)는 은(Ag) 원자들은 예상대로 스크린의 한 지점에 자취를 남겼다. 그런데, 외부 자기장 세기를 불균일하게 증가시키자 입술 모양의 두 부분으로 갈라졌다. 당초 예상대로라면, 은(Ag) 원자가 연속적인 각운동량을 갖는 것이 아니라 허용된 특정 값만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보어-조머펠트 모형의 각운동량 양자화를 지지하는 실험적 결과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자기장이 없을 때(left)와 분균일한 자기장이 존재할 때(right)의 은 원자의 자취 [출처]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Pattern-created-by-a-ray-of-silver-atoms-in-the-original-Stern-Gerlach-experiment-left_fig1_332415749

 

  슈테른-게를라흐의 초기 아이디어와 그로부터 얻어진 실험 결과를 보면, 원자 공간이 양자화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분명한 실험인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실험은 원자 공간의 양자화가 아닌, 전자스핀의 존재와 스핀 양자수 설명을 대표하는 실험으로 소개되는 것일까?

*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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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결과가 발표되던 당시, 대부분 실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실험을 직접 수행한 당사자들조차 그렇다. 몇 가지 잘못된 점들이 절묘하게 겹쳐있었는데, 첫 번째는 1918년에 발표된 보어의 논문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보어는 해당 논문에서 원자의 각운동량이 자기장과 수직 방향인 경우에는 약화되거나 사라지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은(Ag) 원자의 각운동량이 1이라면, 자기장에서 +1, 0, -1의 세 갈래 공간 배향을 가지지만, 불균일한 자기장을 지나면서 수직 방향에 해당하는 0의 자취는 사라져 결과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두 갈래의 흔적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 더군다나, 은(Ag) 원자의 각운동량은 1이 아니라 0이다. 1927년, 슈테른의 연구원인 로날드 프레이저(Ronald Fraser)가 수소(H), 나트륨(Na), 은(Ag) 원자의 바닥 상태 각운동량은 0이고, 자기 모멘트도 0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정리하자면, 은(Ag)의 각운동량은 0이므로 가질 수 있는 공간 상태 또한 0 하나뿐이다. 이 말은 원자의 각운동량에 의한 공간 양자화는 자기장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슈테른이 은(Ag)의 각운동량이 0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애초에 실험을 계획하지 않았거나 다른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러나 분명,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서 은(Ag) 원자의 흔적은 분명 두 갈래로 갈라져 나타났다. 앞의 몇 가지 오류를 바탕으로 생각해봤을 때, 그것을 은(Ag) 원자의 각운동량에 의한 공간 양자화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각운동량이 0인 원자임에도 왜 갈라짐의 흔적이 나타난 것인가? 갈라짐의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들의 실험이 발표되고 약 2년 뒤,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는 네 번째 양자수를 제안했고, 3년이 지난 1925년에 조지 울렌벡(George Eugene Uhlenbeck, 1900-1988)과 사무엘 호우트스미트(Samuel Abraham Goudsmit, 1902-1978)가 전자스핀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이는, 실험을 직접 마친 당사자들도 미처 알지 못했던 두 갈래로 나뉜 은(Ag) 원자의 자취가 뜻하는 진정한 의미를 밝히는 시작점이 되었다.

 

2. 파울리가 제안한 새로운 양자수

  볼프강 파울리는 논문을 출판하기보다 가까운 친구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나 닐스 보어 등과 편지로 의견을 나누는 것을 보다 선호했다. 파울리는 1924년,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결과와 관련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제안했는데, 원자의 각운동량이 아닌, 원자의 최외각 전자가 외부 자기장에 대해 양자화된 위치를 갖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1924년의 파울리 [출처] commons.wikimedia.org @Wolfgang Pauli


  파울리는 원자 내 전자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당시 알려져 있던 주양자수와 부양자수에 두 가지 새로운 양자수를 더해 총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첫 번째는 보어의 에너지 준위를 나타내는 것(주양자수)이었고, 두 번째는 기하학과 관련(부양자수)된 것이라 생각했으며, 세 번째는 자기장 안에서 스펙트럼이 여러 미세한 선들로 갈라지는 제이만 효과(Zeeman effect)와 관련된(자기 양자수) 것이라 생각했다.

  파울리는 네 번째 양자수를 수학적으로 유도해냈는데, 이를 포함하여 정리한 결과가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접해서 친숙한 파울리의 배타 원리(Pauli's exclusion principle)이다. 배타 원리는 1925년 초에 발표되었는데, "같은 양자역학적 상태에 놓인 두 개 이상의 전자가 하나의 원자에 동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같은 양자역학적 상태'란, '네 가지 양자수가 동일한 상태'를 말한다.

  파울리는 네 번째 양자수를 직접 제안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자의 어떤 속성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1925년 11월, 파울리의 마지막 양자수가 전자의 자전 운동과 연관지어 설명될 수 있다는 「개별 전자의 내부 거동의 필요조건을 통한 기계적 제약 가설의 대체」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 한 편이 네덜란드 학술지에 실렸다.

조지 울렌벡, 헨드릭 크라머, 사무엘 호우트스미트 (1928) [출처] commons.wikimedia.org


  이 논문의 주인공이 앞서 언급한 조지 울렌벡과 사무엘 호우트스미트였다. 이들은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 소속으로, 물리학계에서는 거의 무명 신참에 가까웠다. 이들의 논문은 고전물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몇몇 부족한 점들이 있었음에도 '스스로 자전하는 전자'라는 참신한 생각이 물리학계 과학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파울리는 전자를 빙글빙글 회전하는 공처럼 표현하는 것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 사실, 울렌벡과 호우트스미트 조차도 자신들의 생각이 논문으로 출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도교수인 파울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93)는 그들을 지지해주고, 네덜란드 학술지에 투고할 것을 권유하면서, 동시에 헨드릭 로렌츠(Hendrik Lorentz, 1853-1928)에게 자문을 구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울렌벡은 로렌츠에게 논문에 대한 자문을 구했는데, 로렌츠는 그들이 작성한 논문을 일주일간 성의껏 검토한 뒤, 고전물리학적 관점에서 생기는 문제점(전자의 자전 속도가 빛의 속도의 10배가 되어야 한다든지)을  한가득 계산하여 알려주었다. 로렌츠의 피드백을 받은 울렌벡은 에렌페스트를 찾아가 역시 논문을 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지만, 에렌페스트는 "벌써 그 논문은 내가 투고했네. 곧 출판될 것이네. 자네들은 젊은 과학자이니 조금은 바보 같은 짓을 해도 괜찮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들의 아이디어(자전하는 전자)를 바탕으로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결과를 다시 들여다보면, 은 원자가 남긴 두 갈래의 흔적을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수소(H), 나트륨(Na), 은(Ag)과 같은 원자들의 각운동량이 0 임에도, 불균일한 자기장 내에서 갈라짐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장 내에서 자기 모멘트를 갖지 않는 각운동량이 0인 원자를 양자화시켜 갈라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전자라는 입자가 갖는 자체 스핀이 원자의 자기 모멘트의 원인이 된다면, 관찰된 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외부 자기장에 의해 원자가 정렬되는 것이 아닌, 원자 내부의 전자스핀(전자의 자전 방향*)이 정렬되어 나타나는 휘어짐(갈라짐)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파울리가 제안한 네 번째 양자수가 두 가지 값으로만 구분되어야 한다는 조건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 사실, 스핀 양자수를 전자의 자전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이 우리가 원자 내부 구조를 상상할 때 모호함을 줄여주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스핀을 나타내는(표현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자의 스핀은 파울리의 말대로 고전적인 방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성질이다. 



  결국, 슈테른-게를라흐의 실험은 당초 목적과는 달리 원자 내부를 구성하는 입자인 전자의 자체 스핀이 외부 자기장에 의해 정렬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실험적 증거가 되었다.

  이들의 실험은 이후 물리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실험에 사용된 비슷한 장비와 기술을 통해  원자핵도 양자화된 각운동량을 갖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원자가 내놓는 스펙트럼은 원자핵의 스핀 각운동량과 전자의 각운동량 사이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임을 알게 되었고, 변화하는 자기장을 이용하면 각운동량의 상태를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원자핵이 특정 파장의 전자기파를 흡수하게끔 하여 각운동량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을 핵자기공명(Nulcear Magnetic Resonance, NMR)이라 하며, 병원에서 질병 진단에 활용하는 MRI(Magnetic Resonance Image) 장비에도 같은 원리가 사용되고 있다.

자기공명이미지(MRI) 장치 [출처] Pixabay by jarmoluk

 

[참고 자료]

[1] 곽영직, "양자역학으로 이해하는 원자의 세계", 지브레인
[2] 루이자 길더,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부키
[3] 이강영, "네이버캐스트(오늘의 과학-물리산책) - 스핀의 과학"
[4] 장홍제, "화학 연대기 - 세상을 바꾼 작고도 거대한 화학의 역사", EBS BOOKS

 

전자의 스핀  - 끝 -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위에 제시한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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