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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잡담

앎의 대가 : 안알못의 안경 구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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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계식 키보드를 쓰기 전까지, 버튼 눌리고 오타 안나면 다 똑같은 키보드라 생각했고, 에어팟을 쓰기 전까지 어차피 막귀에는 번들 이어폰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드래곤볼을 모아 직접 조립해보기 전까지는 완제품에 적힌 숫자가 크고 비싼 것이 좋은 컴퓨터라 생각했으며, 나스(NAS)를 구축하기 전까지는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기본 용량이면 충분했다.

  지금의 나는 키보드를 고를 때, 무슨 축인지, 키압은 얼마인지를 따져봐야 하고, 노이즈캔슬링 세상에 접속할 때마다 그 고요함에 감탄한다. 드래곤볼을 모으던 과거의 나에게, 왜 돈을 조금 더 들여 블루투스를 지원하는 보드를 고르지 않은거냐며 원망하고, 대용량의 데이터 저장과 외부접속만으로도 충분히 제 값한다고 느꼈던 나스도 빠릿함이 줄어 아쉽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나에게 키보드, 이어폰, 나스에 대해 이야기해도 와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열심히 이야기하는 쪽이 되었다. 차라리 이런 것을 모르던 때가 불편함이 덜했고, 고민이나 욕심도 덜했을지 모른다. 내가 무언가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에 따른 비용은 커져갔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대해 새로이 알아갈 때, 그 과정이 너무나 재밌다. 그래서 한 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못하나 보다.

 

2.

  지난주에는 안경에 빠져있었다. 구글 광고가 온통 안경으로 도배되었다.

  유투브에서 영상을 보다가 우연히 마음에 드는 안경을 발견했고, "어떻게 그 안경을 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또한 6 년 전에 샀던 안경이 둘째 아들의 장난에 다리 골절 진단 받았다는 사실은 새 안경 구입 당위성을 제공해주었다. (물론, 여분의 안경도 두어 개 있고, 외출할 일도 없긴 하다.)

  영상과 비슷한 안경을 찾기 위해 검색하고, 검색했다. 추정되는 브랜드를 찾았다. 국내 브랜드였는데, 안경테만 10만 원이 넘었다. "무슨 뿔테가 10만 원이 넘어?" 내가 걸치고 있는 다리 골절 안경도 인터넷에서 아직까지 팔고 있음을 확인했다. 만삼천 원이었다. 나는 안경이 왜 비싼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끊임없는 검색을 했지만, 영상 속 '그 안경'은 결국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경'은 더이상 내 검색 목적이 아니었다. 다양한 안경매니아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글과 블로그, 커뮤니티 리뷰 등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알아버렸다. 브랜드마다 라인업이 있고, 프레임 형태에 따라 안경의 유형이 구분된다는 것도, 안경 다리에 쓰여 있는 숫자들 의미도 하나씩 알아갔다. 또한 내가 사는 지방에는 매니아들이 추천하는 안경을 취급하는 곳이 별로 없다는 것도 알았다.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3.

  결과적으로 나는 삼 일 내내 안경만 검색하고 앉아있었다. 만삼천원짜리 다리가 부러진 안경을 쓰고 50만 원이 훌쩍 넘는 안경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은 역설의 끝이었다. 다행이 그런 안경에는 쉽사리 구매욕이 당기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에게 감사한 일이었다.

  3 일의 심사숙고 끝에 안경을 하나 구입했다. 정가가 175,000 원이었으나 이런저런 할인을 받으니 10만 원 정도까지 내려갔다. 누구나 받는 할인일 것 같은데, 기분은 좋았다. 그 돈으로 아이들과 피자를 사먹었다.

  안경에 대한 지식과 3 일간 컴퓨터 앞에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비용으로 10만 원 지불한 것이 비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새 안경까지 공짜로 생기지 않았는가? 오늘 안경이 도착했는데, 공짜로 생긴 것 치고 퀄리티가 좋아 매우 만족한다. 이제는 안경 렌즈를 맞추러 갈 결심을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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