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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새 학기를 준비해야 하는 건 복직하는 교사나, 여섯 살 유치원생이나 마찬가지다. 덥수룩한 머리를 정리하려 미용실을 찾았는데, 다들 생각이 비슷했었는지 웨이팅이 좀 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해할 첫째에게 휴대폰을 권했는데, 웬일인지 관심이 없다.
첫째는 요즘 한글 읽기가 재미있나 보다. 차를 타고 스쳐 지나는 간판 속 글자에 관심을 갖는다. 사실, 아직 아는 글자가 몇 개 되지 않는다. 또래에 비해 시기적으로도 빠르지도 않다. 그래도 굳이 글자를 익히라고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본인이 답답하고, 관심이 생기기 시작할 때, 자연스레 익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아이가 궁금해하면 하나씩 알려주고, 점점 넓혀가는 식이다.
아들: 아빠! 저기 있는 글자에 받침대(받침)가 없으면 '가'야?
나: 어떤 글자를 말하는지 아빠가 못 찾겠어. 손으로 알려주면 맞는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첫째가 가리킨 글자는 '당분간 음료 제공이 어렵습니다.'라는 문장 속에 '간' 이었다.
나: 오! 맞아! 숨어 있는 글자를 잘 찾았네?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창문에 붙어있던 안내문에 아는 글자들을 찾고, 하나씩 말해본다. 아직 모르는 글자가 훨씬 많고, 받침이 없는 글자를 겨우 읽는 수준이다.
아들: 아빠 저기에는 '다'가 있어! 옆에는 '이'!
나: 어디?
아들이 가리킨 창밖에는 '점핑 다이어트'라고 쓰여 있었다. 읽을 줄 아는 글자는 두 개 밖에 없는데, 왠지 '어'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슬쩍 떠본다.
나: 아들~ 다이 옆에 있는 글자도 읽을 수 있어?
아들: 아니, 그건 몰라.
나: 아들이 알고 있는 글자 중에 뭐랑 비슷한 것 같아?
아들: '아'랑 비슷해!
나: 오! 맞아. 정말 '아'랑 비슷한 것 같아. 그런데 '아'랑 어디가 다른 것 같아?
아들: '아'는 밖으로 삐쭉했는데, '어'는 안으로 삐쭉했어.
나: 맞아! 그게 다르네! 저건 '어'라고 읽어!
아들: '어'? 대답할 때 하는 그런 '어'?
나: 맞아! 대답할 때 하는 '어'!
아들: 그럼 저기에는 다! 이! 어! 라고 써있네!
조금 지나 까먹을 걸 알지만, 그래도 '아'와 '어'를 구분하고 신이난 아들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해주신 옛날 이야기가 생각난다.
너 어렸을 때, 동생 변비가 심해서 관장약 심부름을 시켰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질 않는거야. 그래서 뭐가 이렇게 걸리나 싶어서 찾으러 가는데, 부동산 앞에 주저 앉아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더라고. 여기서 뭐하냐고 물으니까, "엄마, 나 여기 '복'자랑 '방'자는 읽었는데, 가운데는 뭐라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라 그러더라. 한창 그런게 재밌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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