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의 차이
1. 이야기의 시작
며칠 전, 와이프가 학교에서 겪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무언가 자꾸 대화가 어긋나고 있음을 느꼈다. 문제의 주원인은 '무수 아세트산'이었다. (부부 사이 대화에 등장하는 단어 치고 평범하진 않지만, 전공이 같다 보니 이런 일이 종종 있다.)
둘은 '무수 아세트산'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썼지만, 각자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화는 하고 있었으나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와이프에게 있어서 '무수 아세트산'은 '아세트산 무수물' acetic anhydride, (CH3CO)2O 과 같은 말이었다. 무수물(anhydride)이란, 두 분자의 카복실산으로부터 물 분자(H2O) 하나가 제거된 형태의 화합물을 나타내는 용어다.
CH3COOH + CH3COOH → (CH3CO)2O + H2O
반면, 내가 말하는 '무수 아세트산'은 그저 '물 함량이 적은 순수 아세트산*' acetic acid, CH3COOH 이었다.
[참고] 수분이 적고 순도가 높은 아세트산은 일반적으로 실온에서 마치 얼음과 같은 고체 상태를 갖기 때문에 빙초산(glacial acetic acid)라 불린다. 빙초산이라는 표현은 순수 아세트산의 고체 결정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둘은 각자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한 검색 찬스를 사용했지만, 명쾌한 결론을 주지 못했다. 와이프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무수 아세트산'을 검색하면 '아세트산 무수물'이 결과로 나왔으며, 내 생각을 뒷받침하듯 그 둘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내용도 꽤나 있었다. 포털 사이트 지식IN에도 이와 관련된 질문이 심심찮게 올라오는 것을 보면, 그간 다른 사람들도 명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신에 차 있던 나 역시 점차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각자의 주장의 옳고 그름보다는 용어 혼동의 원인을 찾고 싶어 졌다.
2. 왜 이런 일이?
다음을 살펴보자. 와이프에게 아세트산 무수물과 무수 아세트산은 분명 다른 물질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제시한 실험 책의 질문이다.
Q. 아세트산 무수물과 무수 아세트산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설명하여라.
- 표준 일반화학실험 개정 7판, 대한화학회, 천문각, 288p -
나에게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은 다른 것이며, 철저히 구분해서 다뤄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준 최초의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 자체가 이미 두 용어의 구별이 이루어져야 함을 전제하고 있으며, 두 용어가 동일한 뜻이라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아마 나를 비롯한 과거 또는 현재의 화학 관련 전공자들로 하여금 두 용어의 세세한 구분(무수라는 표현이 앞에 있느냐? 뒤에 있느냐?)에 집착하게 만든 원인이 이것이라고, 감히 나는 판단한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활용되고 있는 일반화학실험 책이다.)
아세트산(CH3COOH, CAS# 64-19-7)과 아세트산 무수물((CH3CO)2O, CAS# 108-24-7)은 분명 다른 물질이다. 두 화합물은 구조적, 화학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며, 적어도 화학 관련 전공자가 이 둘을 헷갈려하지는 않는다. 의견이 나뉘지도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아세트산 앞의 '무수'라는 표현이다. 별도의 화학식 없이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은 같은 물질인가? 다른 물질인가?라고 질문하면, 같은 화학 전공자라도 그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수 [없을 無, 물 水]는 한자어로, 뜻 그대로 풀어쓴다면 '물이 없음'을 말한다. 결국 번역의 문제다. 최초에 누가, 어떤 의도로 '순도 높고, 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을 짧은 한 단어 '무수'라는 불친절한 용어로 번역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 선택한 '무수'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 여기서 혼란이 야기된 것이 맞다.
카복실산 무수물(carboxylic anhydride)의 존재를 모르는 이(또는 알았더라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은 이)가 'anhydrous acetic acid' 를 영단어 그대로 번역한 데서 발생한 문제이다. 아세트산의 영문 위키피디아의 문장 일부를 번역해보면,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있다.
원문) Glacial acetic acid is a name for water-free(anhydrous) acetic acid. Similar to the German name Eisessig(ice vinegar), the name comes from the ice-like crystals that form slightly below room temperature at 16.6 ℃.
해석) 빙초산은 수분 함량이 적은(anhydrous) 아세트산을 가리킨다. 이는 상온(16.6 ℃)에서 마치 얼음 같은 결정이 된다는 것으로부터 유래한 독일 이름 'Eisessig' (얼음[Eis] 식초[Essig])와 유사하다.
[출처] en.wikipedia.org/wiki/Acetic_acid
위의 문장을 '빙초산은 무수 아세트산의 이름이다.'로 번역한 꼴이다. 차라리 고순도(high-purity) 아세트산 혹은 순수 아세트산 등과 같이 무수물(anhydride)이라는 용어와 분명히 구분되도록 조금만 신경 써서 번역했다면, 이런 혼란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세트산 '무수물'에 비슷한 용어가 분명 포함되어 있음에도 순수 아세트산을 나타내는 여러 표현 중에 'anhydrous acetic acid' 를 굳이 번역하여 '무수' 아세트산이라는 헷갈리는 용어를 썼을까?
이전까지 나 역시 학생들과 아스피린의 합성 실험을 진행했었고,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의 용어 구분을 강조했었다. 왜 그렇게 헷갈리는 용어로 되어있을까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그저 학생들에게 구분을 강요(?)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의 구분을 요구하지 않을 생각이다.(의미상 요구하지 않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을 동일 물질, 동일 용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물 함량이 적은 순도 높은 아세트산(=빙초산)'을 지칭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대체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고순도 아세트산, 순수 아세트산 정도만 해도 의미 전달은 충분하다. 무수물과의 구분도 문제없다.
Q. 아스피린 합성 실험에서 순도가 높은(water-free) 아세트산을 사용하는 것과 아세트산 무수물(=무수 아세트산, acetic anhydride)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시오.
현재 대부분의 시약 회사에서도 무수 초산, 무수 아세트산 등의 용어로 검색하면, 아세트산 무수물(acetic anhydride)이 검색되고 있으며, 포털사이트 백과사전 등에도 잘못된 번역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3. 그래서 결론은?
혹시나 그래도 명확하게 정리되길 바란다면 이렇게 정리하자.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로 싸우지 말자.
1. 수분이 거의 없는 100% 순수한 아세트산(=빙초산)의 영어식 표현인 anhydrous acetic acid을 '무수 아세트산'으로 번역해서 이 혼돈의 카오스 문제가 발생했다. '무수 아세트산'이라는 표현은 '아세트산 무수물'과 혼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번역은 아니다.
2. 무수 아세트산이라는 용어는 아세트산 무수물과 같은 표현(=무수물)으로 받아들여져야 용어에 의한 혼란이 적다.
3. 따라서 수분이 거의 없는 100 % 순수한 아세트산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순도 아세트산'이나 '순수 아세트산' 등의 무수물(anhydride)로 혼동을 주지 않는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굳이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의 차이를 구별하라고 한다면, 흥분해 따지기 전에 이렇게 생각하자. 이 분들은 물이 섞이지 않은 고순도(high-purity) 아세트산(=빙초산)과 아세트산 무수물(anhydride)의 차이에 대해 묻고 있다는 것을. (나처럼) 불친절한 번역의 애꿎은 피해자일 수 있다.
5. 힘들게 화학 하는 사람끼리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 앞으로의 화학 꿈나무들이 용어를 헷갈리지 않도록 정착시키자.
무수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무수물의 차이 -끝-
'화학 > 화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학 전문 용어가 궁금하다면? (0) | 2020.10.19 |
---|---|
표준 상태, 표준 엔탈피, 표준 자유에너지 (12) | 2020.10.15 |
프랭크-콘돈 원리 (Franck-Condon Principle) (22) | 2020.09.25 |
용액의 농도 : 원하는 농도의 용액 만들기 (12) | 2020.09.13 |
화학 결합과 거리에 따른 에너지 변화 (41) | 2020.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