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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독서

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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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공평한 사회일수록 차별에 의한 상처가 깊다

격차

 

- 세르주 모스코비치 (Serge Moscovici, 1925-2014)

 

  기업에서 인사 평가 제도를 설계할 때, '공정한 평가'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항상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 책에서는 공정에 대해 조금은 다른 물음을 던진다. '공정한 것은 과연 좋은 것일까?'

  공정이 이렇게까지 바람직하고 분명한 것이라면, 우리 조직과 사회에서 공정성이 실현되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치 않다. 이를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 한 가지는 '그 누구도 본심은 공정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고, 책에서 언급한다. 신분 제도에 의한 차별이 철폐되고, 민주주의 사회가 실현되었지만, 차별과 격차는 완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신분이 공공연하게 나뉘어 있던 시대보다도 차별과 격차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우리 사회를 애먹이고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유는 간단하다. 표면적으로 신분 차이가 없어지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기에 오히려 차별이나 격차가 더 부각된 것이다.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어 당연시 여겨지는 과거 시대에서 사회의 하위층에 속해있는 개인은 상위층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부러움과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애초에 '비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신분 차별이 없어지면, 표면적으로 누구나 상위층에 속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비슷한 출생 환경이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 다른 높은 계층에 속해 있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 의문은 결국 '이 사회는 공평함이 저해되어 있다.'라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모두에게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을 때, 차별이나 격차가 더 부각된다는 사실을 2000년도 전에 지적한 사람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자신과 같거나, 같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사람들은 시기심을 품는다. 내가 말하는 같은 사람이란, 집안이나 혈연관계, 연배, 인격, 세상의 평가, 재산 등의 면에서 같은 사람을 뜻한다. (...중략...) 결국 사람은 시대와 장소, 연배, 세상의 평가 등 여러 면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차별이나 격차가 이질성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생각과 반대로 '동질성'이 높을 때 발생한다 것을 모스코비치 역시 지적하였다. 모스코비치는 인종 차별에 관해 날카로운 통찰을 남겼는데 고자카이 도시아키의 책에서 그의 지적을 찾을 수 있다.

  인종 차별은 오히려 동질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와 깊은 공통성을 지닌 자, 나와 같은 의견을 갖고 같은 신념을 지니고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발견되는 불화는 설령 작은 일 일지라도 참을 수 없다.

고지카이 도시아키 『사회 심리학 강의』 

  그밖에 19C 전반에 활약한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 또한 평등을 이상으로 내건 민주주의가 갖는 모순을 지적한 바 있다.

 불평등이 사회 공통의 법일 때는 최대의 불평등도 사람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거의 평준화될 때, 인간은 최소의 불평등에 상처받는다. 평등이 커지면 커질수록 항상 평등의 욕구가 더욱 크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알렉시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토크빌의 지적은 우리가 공정한 조직과 공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데 도사리고 있는 본질적인 모순을 들추어낸다. 만약 조직과 사회가 공정하고 공평하다면 그 중에서 하위층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도망칠 길이 없다. 인사 제도나 사회 제도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재능과, 노력 등이 남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하위층에 있다고 밖에 해석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불공정함 속에서 '서열의 기준이 정당하지 않다.' 또는 '기준은 정당하지만, 평가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믿음 덕분에 우리 스스로가 가진 열등함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 공정하고, 완전 공평한 조직에서는 이러한 자기 방어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저 이상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공정하고, 공평한 평가'는 바람직한 것인가? 그 이상이 실현되었음에도 '당신은 뒤쳐져 있다'고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자기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사회는 정말로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인가? 공정이란 개념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중에서

 

 

  덧붙여, 위의 글만 읽어서는 마치 글쓴이가 신분제도와 차별 제도를 바람직하게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공정한 조직과 사회를 추구해야한다는 사실은 변함 없지만, 이것을 절대적인 선(善)의 가치로서 받아들이는 데는 한 번 더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며칠 전 대입 특별전형 폐지와 100% 정시모집을 골자로 한 입법이 추진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현재 시끄러운 수시 모집의 학생부 종합 전형의 공정성 문제가 정시 모집 확대로 연결되었나보다. 정시 100%로 대학을 진학했던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았을 때,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학교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타의 문제를 제처두고 온전히 공정한 평가에 관해서만 생각해보았다.

  다른 부수적인 요인을 제거하고, 완전 무결한 공정한 수능을 기반으로하는 100% 정시체제가 갖추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서열에서 밀린 하위층에 위치한 학생들은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의 열등함을 수험표로 돌려 받게 될 것이며, 이는 학생의 고등학교 3년을 평가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자신 또는 자신의 자녀가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교육과 결과물에 매달려야 하고, 높은 평가 결과를 얻어야만 한다. 결국은 과열될 것이며, 또 다시 과거의 고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실 교육에 있어서는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꼭 입시라는 것과 선발의 체계화, 세밀화가 필요할까? 더 나아가 평가 자체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뜬금없이 국공립 유치원 원아 모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국공립 유치원의 경쟁률은 과장을 조금 보태면, 대입 경쟁 못지 않다. 유치원 추첨 때 내 자녀가 뽑히지 않았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내 자녀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다. 단지 선발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추첨이 모두에게 공정하고,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은 선행되어야만 한다. 국공립 유치원의 원아 모집을 대입으로 바꿔도 좋을 것 같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또한 말 그대로 대학이라는 상위 교육기관에서 수학할 능력이 되는지를 판단하는 목적으로만 쓰였으면 좋겠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나는 교육에 있어서는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실 가능성에 대한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나 역시도 공정한, 공평한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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