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담

평가와 학습에 대한 단상

stachemi 2024. 11. 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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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딱- 공부한 만큼만 점수가 나오는 시험

  새 학교에서의 첫 정기고사를 마친, 지난 5월에 있었던 일이다. 고3 화학2 전담으로, 미세한 변별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새 학교 첫 시험이기에 나름 출제에 신경을 썼다. 이전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것은 아니지만, 사용하는 교과서도 달라지고 내 스타일에 익숙치 않은 아이들이기에 성취도 확인이라는 평가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다.

  시험을 마친 후, 동료 선생님께서 화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화학은 어땠니?”라고 물으셨는데, 학생 중 하나가 “딱- 공부한 만큼만 나올 시험인 것 같아요.”라고 했다고 말을 전해주셨다.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시험에 대한 반응이 단순히 쉬웠어요, 어려웠어요가 아니고 평가 문항으로 적합했다고 학생들이 느꼈던 것 같아서 좋았다.

 

1. 평균과 석차는 학생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메마른 감정의 극 T형 인간이지만, 나도 시험을 치르기 전 아이들에게 응원 메시지를 하긴 한다.

“그간 노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길 바란다!”

   주로 내가 건네는 말이다. 노력은 꾸준히 하는데,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잦으면 무기력감에 빠지기 쉽고, 노력한 것 이상의 좋은 결과를 자꾸 경험하면, 자신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잃기 쉽다. 어떤 경우든 지나치면, 독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노력과 결과에 대한 간극이 계속해서 크게 나타난다는 것은 노력에 대한 자기 판단이 잘못되었거나 수행 과정에서의 태도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학교에서 정기고사를 치르는 경험이 학생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소 학습 태도나 생활 방식을 디자인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가 결과를 나타내는 지표인 평균이나 석차 등의 숫자들은 오히려 수업을 설계하고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에게 중요한 지표이지, 학생 개개인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위한 피드백이 필요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피드백의 형태가 '전체 평균이 몇 점인데 너는 전체 중 몇 등이고, 평균에 몇 점이 모자란다.'와 같은 상대적인 값들 보다는, 직접 수업하고 평가하면서 느끼는 교사의 진실된 코멘트 한 마디가 더 낫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이는 교사의 전문성이 확보되었고, 학생과의 래포 형성이 되었다는 전제가 있을 때다.

 

2. 평가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되는 이유

  종합격투기 선수이자, 예능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동현 선수가 이전에 '라디오스타'에서 '운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보고, 많은 공감을 했었다. 

전 근데, 선수할 때도 시합을 하기 위해서 운동하지 않았어요.
시합에 집중하면 안 되는 게, 선수들 (시합은) 1년에 두 세 번 밖에 안 해요.
15분, 두 번밖에 안 하는데, 그거에 포커스를 맞추면 힘들어요.

저는 그냥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애들하고 힘든 운동하고 커피 한 잔 하고,
그게 너무 즐거워서 그거에 집중하면서 살다가,
가끔 시합이 있으면 시험 무대하고, 다음 날 체육관 와서 또 운동했어요.

그래서, 시합 졌다고 호텔 방에서 우울하게 있고, 스트레스받고 자책하는 것이 이해가 안 돼요.
그동안 내가 살아온, 운동한 거에 대한 결과예요. 그게 억울하면 평소에 더 해야 되는 거예요.
더 잘 싸울 수 있는데, 일방적으로 좀 아쉽게 진 경우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다 (내) 실력이에요.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많은 아이들은 1년에 4번 있는 정기고사를 위한 학습에 허덕이고 있다. 물론,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 그랬었고, 대학 시절에는 매 주마다 휘몰아치는 퀴즈에 휘청거렸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수험 생활 첫 해에도 1년에 딱 한 번있는 시험에만 메어 있었다. 그러니, 어찌보면 누구나 겪게 되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오히려 평가라는 이벤트로부터 스스로 멀어질 수 있을 때, 진짜 공부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크게 느낀다. 나는 다소 깨달음이 늦었지만, 교실 속 아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조금이나마 빠르게 알았으면 해서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된다.

  임용 준비 마지막 해에는 시험에 대한 압박, 긴장감이 거의 없었다. 매일 아침, 독서실에 나가서 오전 공부를 하고, 독서실 메이트와 점심 먹고 커피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좀 나누다가, 오후 공부를 하고, 저녁을 먹고, 적당히 마무리를 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하루하루가 나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며 보냈다. 공부가 잘되는 날도, 버벅거리다가 그냥 하루를 날리는 날도 있었지만, 예측할 수 없는 자잘한 이벤트 때문에 초조하거나 압박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이 되지 않던 개념이나 단원에 대해 무언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시작할 때, 어떤 단원에서 특정 유형의 문제가 자주 출제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을 때, 공부 자체가 재미있었고 시간도 잘 갔다.

  그간 여러 시행착오를 경험한 덕분에 그러한 과정을 겪고 결과를 얻게 된 것인지, 시험과 한 발짝 떨어져 하루하루의 생활에 온전히 집중하였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인지, 무엇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개인의 만족과 과정에서의 성취동기가 더 큰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3. 특별한 이유는 없고, 특별한 이유를 만들 필요도 없다.

  결국 학습은 동기와 습관에 관한 것임을 느끼게 된다. 4년 전 코로나 시절에 썼던 글(163)을 다시 읽어봐도, 현재 나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실 속 격차는 기회, 동기, 성취 격차로 구분되는데, 학습 효율에 큰 영향을 주고, 격차를 만들어내는 요인은 학습 동기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학습 동기가 "특별한 무언가, 의미 있는 무언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고, "습관 또는 이유없이 해야 할 일"정도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학습에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초등학교 2학년인 첫째는 매주 수요일마다 집에서 할아버지와 받아쓰기 연습을 한다. 할아버지가 연습 문장을 불러주면, 아이는 받아쓴다. 받아쓰기 연습을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담임 선생님께서 "수요일마다 두 번씩 읽어보고, 연습해 오세요."라고 말씀하신 것과, 다음날 아침 학급 활동으로 받아쓰기를 하니까 정도이다. '받아쓰기에서 100점 받기 위해'도 아니고, '한국인으로서 맞춤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를 붙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받아쓰기 100점이나, 맞춤법에 대한 이해도 향상은 꾸준한 연습과 반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잠정적인 결과들일 뿐이다. 매일매일의 과정 속에서 부모가 기대하는 것은, '아이가 그 일을 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정도이다. 그래서 전날 받아쓰기 연습을 했는지는 관심 갖지만, 받아쓰기 점수는 묻지 않는다.

  세상 일 중에, 해야 하는 이유가 명확한 일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이유가 있어서 하는 일보다는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해야 하는 일들이 훨씬 더 많다.

 

4. 공부가 수단이 되면...

  두 아이를 키우는 초보 아빠이지만, (개인적으로)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 "그림책을 1시간 읽으면 게임 1시간 하게 해줄게.", "숙제를 다했으니까, 유튜브를 보게 해줄게.", "받아쓰기를 100점 맞으면, 선물을 줄게." 등의 댓가성 말을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보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숙제는 숙제고, 유투브는 유투브다. 둘 사이의 인과 관계를 굳이 만들 이유가 없다.

  아이들이 공부를 조금씩 꾸준하게 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보상을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활용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공부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동의하지만, '계층 이동을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동의할 수 없다. '사회적 계층 이동'은 꾸준한 공부의 '결과물'이 될 수는 있지만, 사회적 계층 이동이 공부의 '목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실상) 입시가 끝난 2학기의 3학년 교실은 갈 길을 잃었다. 수능 한 방으로 대학을 가던 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2024년의 현재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과거에는 맹목적이고 반복적인 문제 풀이가 교실을 삼켜버렸다면, 지금은 교실 속 모습이 다양하기는 하다. 눈감고 기도(?)하거나, 빠르게 변하는 가상 세계에서의 또 다른 자아를 위한 수련에 바쁘다. 교실 속 학생들의 다양한 동기가 뒤섞여 어느 한쪽 방향으로 끌고 나가기 어렵다. 수능 점수가 절실한 학생 조금, 수능 최저를 맞추면 좋기는 한 학생 일부, 수능은 남 이야기인 학생 일부, 면접이 더 절실한 학생 일부, 신의 보살핌이 중요한 학생 일부가 뒤죽박죽 섞여있다.

  현재의 사회적, 제도적 환경 하에서 고등학생의 학습 동기에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라는 수단으로써의 성격을 떼고 생각할 수 없다. 좋은 내신을 받기 위한 이유도, 바쁜 시간을 쪼개 심화 탐구 활동을 계획하고 보고서를 쓰고 제출하는 이유, 수능 기출 문제 풀이와 중도 포기생이 발생하는 이유도 결국은 하나로 귀결된다. 평가 체제를 어떻게 바꾸든, 학습 동기 자체가 '수단'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방법을 어떻게 바꾸든 과정은 비슷하게 흘러간다.

  좋은 대학이라는 결과물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학교 교실에서 시작부터 동기를 잃었고, 처음엔 관심있었지만 학교 생활을 거듭하면서, 점차 자신의 목표(대학)에 도달하기 어려워지면, 교실에서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벽을 만든다. 고등학교 입학 후, 1년 안에는 교실 구성원의 일부만이 동기를 잃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의미를 잃은 학생 비율이 늘어나기만 하고, 줄지는 않는다. 결국 동기를 잃은 학생이 누적되어버린 교실은 길을 잃는다.

  3학년이 되면, 지난 2년의 결과를 다이나믹하게 역전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러한 사실은 학생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다. 3년의 학교 생활을 종합적으로 평가 받는 수시 체제에서 1, 2학년의 감추고 싶은 흔적을 지우고, 덮으려해도 깨끗하게 가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눈높이를 낮춰 현실과 타협하거나, 목표와 신념을 지키기 위해 지나온 과거를 덮어두고 한타 싸움에 승부를 거는 아이들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정시와 한 판 크게 붙기로 마음먹고 '나는 오늘부터 정시파이터입니다.' 선언까지 했는데, 질 가능성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진심으로) 노력하기가 어렵다.

  고등학교 교실을 구성하는 두 주체인 교수자와 학습자 중 누구라도 학습을 성취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면, 교육은 교육다워 질 수 없다. 그렇다고, 순수한 목적만으로 운영되는 교실이 현실에서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5. 그럼에도...

  공부에는 거창한 이유나 목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공부를 포함한 모든) 실패(또는 좌절)의 경험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떠어떠한 요인 때문에 실패했다.'와 같은 실패로 이끈 원인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실패라는 경험 자체가 주는 내재된 가치를 믿는다는 뜻이다.

  성공만으로 채워진 삶에서 느낄 수 없는 감정과 생각들을 실패가 제공한다. 실패는 자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거나 수정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극을 제공해준다. 그러한 자극과 피드백을 얻기 위해 우리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자원을 미리 선지불한다. 만약, 실패와 좌절이 현재를 변화시키기에 부족하거나 큰 메시지를 주지 못했다면, 더 큰 자극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몇 차례의 작은 실패(목표에서 벗어나거나 기대에 못미치는 정도의 결과)는 자기 반성과 깨달음의 기회가 되어주고, 방향을 수정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한 번의 실패도 경험하지 않은 채, 언제 닥칠지 모를 실패를 불안 속에 기다리며 나아가는 것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실패 경험이 효율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부에서의 실패(좌절) 경험은 비교적 적은 손해를 바탕으로 무언가 생각하게끔 해주는 가성비 좋은 경험의 분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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