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충 용액 (buffer solution)
완충 용액 (buffer 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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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계열을 희망하는 많은 수의 학생이 진로선택 과목으로 화학2를 듣는다. 화학2는 메디컬 계열 진학 이후 접하게 될 내용들과 나름의 연관성을 갖기에, 그 선택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생명과학보다는 후순위로 생각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관련 계열 희망 학생들 상당수가 화학2 세특(세부능력 특기사항)에도 생명과학 교과 연관성, 진로 방향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특정 진로 방향성만 지나치게 드러내면서 다른 교과목에 치우친 세특보다는, 오히려 해당 교과 내용의 깊이를 갖추고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탁월함을 밑바탕에 깔고, 전반적인 흥미나 활동 주제들이 진로 방향성을 간접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평가자가 가질 수 있는 능력에 대한 불확실함을 해소시켜 주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기부 다른 면은 몰라도 과목 세특은 '해당 교과의 우수성'과 해당 교과에 대해 사고한 경험의 깊이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런 부분이 갖춰졌다고 판단될 때, 다른 요소들이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명심할 것은 화학 세특은 화학적 역량을 확인하기 위한 공간이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와는 상관없이, 지난 경험 속 관련 계열 희망 학생 대부분은 생명과학 적성 및 인체 관련성을 어떻게든 화학 교과 내에 녹여내려는 시도를 했으며, 발표 및 보고서에는 '혈액의 완충 작용', '인체의 항상성 유지', '효소-촉매 반응' 등의 주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주제 자체만 보면 화학2 교과 개념과의 연관성 또한 충분하기에, 화학적인 접근을 통해 제대로 된 설명으로 풀어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긍정적 이리라고 나 역시 생각한다. 다만, 준비 과정에서 너무 '제목(주제)'에만 매몰되어 내용을 저 멀리멀리 산으로 보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혈액의 완충 작용과 인체의 항상성 유지는 '산-염기 완충 용액과 완충 효과, 완충 용량'에 대한 개념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진 이후에 혈액의 사례에 적용했으면 하고, 효소-촉매 반응은 '화학반응속도론과 메커니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면 한다.
이번 글을 통해서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단골 수행 평가 주제 중 하나인, 화학에서의 완충 용액(buffer solution)과 완충 시스템(buffer system)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완충 용액이란?
완충 용액(buffer solution)은 외부로부터 소량의 강산(H+)이나 강염기(OH-)가 첨가되어도 pH 변화가 거의 없는 용액을 말한다. 'pH' = '수소이온농도'이고, 완충 용액은 큰 변화 없이 거의 일정한 pH를 유지된다고 했으니,
완충 용액을 용액 내 수소 이온 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시스템을 갖춘 용액이라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완충 용액은 외부에서 첨가된 (소량의) 산 또는 염기에 의해
용액 내 수소이온농도(pH)가 변하는 것을 최소화한다.
예를들어 완충 용액에 강산이 첨가되어 용액 내 수소 이온(H+) 수가 급격히 많아지면, 용액의 pH는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완충 용액은 즉각적으로 첨가된 수소 이온을 제거하여 초기 수소이온농도(pH)를 지키려는 기작이 발동한다. 반대로 강염기가 첨가되어 용액 내 존재하던 수소 이온(H+)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 즉각적으로 수소 이온을 보충하여 초기 수소이온농도(pH)와 비슷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용액 내 어떤 pH 변화 방어 시스템이 구축된 것일까?
2. 완충 용액 구성과 작동 원리
가. 완충 용액의 작동 원리
완충 용액의 pH 유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르 샤틀리에 원리에 따른 평형 이동과 공통 이온 효과'에 의한다. 르 샤틀리에 원리는 외부 자극에 의한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반응이 진행된다는 평형 이동의 법칙이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산 또는 염기는 일종의 '외부 자극'이고, 이런 외부 자극이 기존 평형(pH)을 깨뜨린다. 이후 '르 샤틀리에 원리'에 따라 '새로운 평형(pH) 상태'로 반응이 진행된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만약, HA가 강산이라면, 반응의 평형은 짝염기(A-)와 수소 이온(H+) 쪽에 완전히 치우쳐 있다. 사실, 평형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이며, 외부 자극에 따른 평형 이동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 그냥, 정반응 우세다. 짝산인 HA라는 형태가 존재할 것이라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HA가 약산일 때는 수용액에서 짝산인 HA와 적은 양이지만 수소 이온 H+, 짝염기 A-가 함께 존재하며, 적절한 비율을 갖는다. 이 비율이 평형 상수(산 이온화 상수)라는 값으로 표현되고,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해당 값을 유지한다. 평형을 유지하고 이를 위한 이동의 방향을 갖는다. 이동의 방향을 예측하게 해주는 원리가 르 샤틀리에 원리다. 완충 용액 구성을 위한 첫번째 필수 조건은 약산(또는 약염기)의 평형이다.
외부에서 강산(H+)이 첨가되면, 약산의 평형 반응식에서 생성물인 수소 이온(H+)의 농도가 순간적으로 증가하고, 주어진 온도에서의 평형이 깨진다. 다시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르 샤틀리에 원리에 따라 생성물의 농도가 감소하는 방향인 역반응이 우세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짝염기 이온(A-)도 함께 줄어든다.
동시에, 감소한 짝염기 이온(A-)만큼 반응물인 짝산(HA)도 함께 생겨나는데, 용액 내에 충분한 수의 짝산(HA)과 짝염기(A-)가 용액 내 함께 존재했던 상황이라면, 외부 자극 이후 도달한 새로운 평형에서의 농도와 비율이 초기 상태와 별 차이가 나지 않아 pH 변화가 최소화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나. 완충 용액의 구성
따라서 완충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용액 내 약한 산(HA)과 그 약산의 짝염기(A-)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중요한데, 짝산-짝염기 관계 화학종인 HA와 A- 의 절대적인 양이 비슷할수록 완충의 효과가 좋다. 용액의 짝산-짝염기 초기 농도가 완전히 같을 때, '기존 평형'과 '새로운 평형'의 환경(pH) 차이가 가장 덜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완충 용액은 같은 농도(몰수)의 짝산과 짝염기를 혼합하여 만드는 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이다.
예를 들어 Ka = 1.76 × 10-5인 아세트산(CH3COOH)과 짝염기인 아세트산 음이온(CH3COO-)을 같은 농도로 혼합하면, 완충 효과가 좋은 pH 4.75 짜리 용액을 만들 수 있다. 비슷하게, Ka = 1.76 × 10-4인 폼산(HCOOH)과 폼산 음이온(HCOO-)을 같은 농도로 혼합하면, 완충 효과가 좋은 pH 3.75짜리 용액을 만들 수 있다.
위의 예시를 보면, 아세트산/아세트산 음이온 완충용액 pH = 4.75, 폼산/폼산 음이온 완충용액 pH = 3.75으로, 용액의 pH가 약산 pKa 값과 같다.
즉, 어떤 약산/짝염기 조합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만들어진 완충 용액의 기준 pH 값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용액의 타깃 pH와 유사한 pKa를 갖는 약산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완충 용액 제조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헨더슨-하셀바흐 식과 완충 용액의 초기 pH
위의 예시에서 아세트산 완충 용액 pH = 4.75, 폼산 완충 용액 pH = 3.75 이다. 이런, 완충 용액의 초기 pH는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이는, 약산 평형 반응의 산 이온화 상수(평형상수) 식을 헨더슨-하셀바흐(Henderson-Hasselbalch) 식 형태로 바꾸어 나타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온화 상수(평형 상수) 식, 양변에 -log를 취하면,
좌변과 우변을 정리하면,
평형상수 식을 위와 같이 pH와 pKa에 대해 정리한 것을 헨더슨-하셀바흐 식이라 한다. 헨더슨-하셀바흐 식 크게 세 구역으로 구분된다. 좌변의 용액 pH와 용액을 구성하는 화학종 종류(pKa), 짝산/짝염기 존재 비율항으로 표현된다.
[1] 식을 구성하는 요소 중, pKa는 완충 용액을 구성하는 화학종에만 의존하는 일종의 상수 값이다.
예를 들어 아세트산과 아세트산 음이온으로 완충 용액을 만들기로 결정했다면, pKa = - log(1.76 × 10-5) = 4.75로 고정된 값이 된다. 만약 폼산과 폼산 음이온을 사용한다면, pKa = - log(1.76 × 10-4) = 3.75로 고정된다. 즉, 헨더슨-하셀바흐 식 우변 pKa 값은 완충 용액을 이루는 화학종 종류에 따라 결정되는 값이다.
[2] 완충 용액의 주된 목적은 헨더슨-하셀바흐 식의 좌변의 pH 변화가 최소가 되는 것이다. 이미 우변의 pKa 값은 완충 용액을 구성하는 화학종에 고정된 상수항이므로, pH 변화는 오직, 우변의 용액의 약산/짝염기 존재비(= log([A-]/[HA])) 변화에만 의존하게 된다.
앞에서 살짝 언급했고, 별도의 글(완충 용량)에서 직접 비율을 달리하며 직접 보이겠지만, log 안의 [A-]/[HA] 값이 1에 가까울수록 외부 자극에 대한 pH 변화가 최소화된다. 이에 완충 용액은 약산과 짝염기 농도가 같게끔 하여 만들어진다.
[3] 결국, 약산과 그 짝염기를 같은 농도가 되게끔 하여 만들어진 용액은 헨더슨-하셀바흐 식의 우변 log([A-]/[HA]) 항이 0이 되며, pH = pKa + 0 를 만족하게 된다.
약산과, 그 짝염기의 비율이 같아질 때, pH 변화가 최소화된다는 사실은 약산을 강한 염기로 적정하는 과정에서의 pH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아래 그래프의 당량점의 절반이 되는 지점인 반당량점에 주목해 보자.
NaOH 첨가에 따른 HCOOH의 pH 변화를 살펴보면, 반당량점 지점(약 8.3 mL 첨가 지점, C)에서의 기울기가 가장 완만함을 확인 수 있으며, 이는 염기 첨가에 대한 pH 변화 정도가 최소(완충 효과 최대)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해당 지점에서의 pH = pKa 라는 사실은 덤이다.
4. 마무리
정리하자면, 완충 용액은 외부에서 첨가된 소량의 강산 또는 강염기에 의해 pH가 급격하게 변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용액이다.
외부 자극에도 불구하고 용액의 pH가 급격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완충 용액이 구성된 환경에 따른다. 완충 용액은 약한 산과 해당 산의 짝염기가 함께 존재하며, 비슷한 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용액 내 존재하는 약한 산과 그 짝염기는 첨가된 H+, 또는 OH-를 즉각적으로 제거하여 평형을 이동시켜 짝산과 짝염기의 형태로 바꾸고, 이러한 평형 이동의 결과로 용액 내 짝산/짝염기의 비율이 달라지게 된다. 용액 내 짝산/짝염기 비율이 변하면, 어쩔 수 없이 pH 변화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외부 자극인 H+ 또는 OH- 농도 변화에 의한 직접적인 pH 변화보다 폭을 작게 할 수 있다.
완충 효과를 극대화 위해서는 초기 용액을 구성하는 짝산/짝염기의 농도를 같게 맞춰 주는 것이 좋으며, 이 경우 구성된 짝산의 pKa와 같은 pH의 완충 용액을 얻을 수 있다.
다음 글을 통해서는 완충 용액의 짝산/짝염기 비율과 농도에 따른 pH 조절 능력의 차이(완충 효과와 완충 용량)를 예시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 끝 -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 용액의 완충 효과를 높이는 방법(feat. 완충 용량) : https://stachemi.tistory.com/321
[수정사항]
* 2024-06-23 완충 용액의 작동 원리 일부 내용 보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