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왜? (feat. 2022개정 화학 교육과정)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대한 짧은 생각
2022년 12월 22일, 2022 개정 교육과정이 고시되었다. 교육청에서도 2022 개정 적용을 위한 준비 사업들이 하나둘 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장 적용의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내가 6차 교육과정의 끝세대인데, 이후 7차(+2007 개정), 2009 개정, 2015 개정을 거쳐 현재는 2022 개정을 앞두고 있다. 학생에서 교사로, 그리고 교직 생활을 거치면서 벌써 5번째 교육과정을 맞이하는 셈이다. 다른 교과목의 변천사까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과학과 내에서 일어난 변화만 살펴보자.
6차 교육과정이 다른 교육과정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공통과학이었다. 공통과학은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 영역을 뽑아 만들어진 합본과학이다. 과학계열 선택 과목을 문과는 물화생지Ⅰ을, 이과는 물화생지Ⅱ를 선택하여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차 공통과학은 언뜻보면, 2009 개정의 10학년(고등학교 1학년) 과학, 2015 개정의 통합과학과 유사해 보이지만, 내용 구성에서 물, 화, 생, 지 교과목 연계성에 따라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큰 차이다. 2009 개정의 10학년 과학(융합과학)이나, 현재의 2015 개정의 통합과학은 전체적인 내용 전개가 물화생지의 단원별 구분보다는 우주의 탄생(과거)에서부터 현대 과학 기술(현재)에 이르는 시간 흐름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의 과학교과 안에서 개념 간 연결에 관심을 가지도록 교육과정이 구성되어 있다.
1.
사실, 글쓰기 버튼을 누른 것은 새로운 2022개정 화학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이다.
2022개정 과학과 교육과정의 눈에 띄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과목의 학기 단위 운영, 그리고 물화생지의 Ⅱ과목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물론, 해당 교과가 차지하던 자리에 완전히 구멍이 뻥 뚫린 것은 아니고, 기존 Ⅱ 과목 단원 특성에 따라 물화생지Ⅱ 단일 과목이 각각 두 개 교과로 모두 쪼개졌다. 화학Ⅱ를 예로 들자면, "물질과 에너지", "화학반응의 세계"이다. (사실, 2015 개정 화학Ⅱ의 1,2 단원과 3,4 단원 느낌이긴 하다.)
자연스레 기존의 Ⅰ교과들은 숫자를 떼고, 일반 선택 과목으로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으로 이름이 변했으며, 세부 전공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 공식적으로 Ⅰ, Ⅱ로 단계를 밟아나가던 과학 교과의 위계가 무너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Ⅰ이라는 숫자를 뗀 새로운 2022 화학은 그 나름대로 어정쩡해졌고, 대학 화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세부 영역 또한 Ⅱ과목 실종으로 결손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다. (Ⅰ, Ⅱ라는 명칭이 주는 단원 및 개념 연계가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생각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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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개정 교육과정의 학생들이 화학Ⅱ를 수강했음에도, 반응의 자발성(깁스 자유에너지)을 배우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면,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원자 내 전자에 작용하는 원리, 규칙, 양자수에 따른 전자배치와 오비탈을 배우지 않고, 원소의 주기성에 대한 배경을 전혀 모르는 채,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커졌다. (오비탈 없는 화학이라니...) 대학교 1학년 일반화학에서 슈뢰딩거 파동 방정식과 함께 양자수 처음 접하고, 1s, 2s, 2p 파울리 배타 원리 훈트 규칙으로 카운터 맞아 얼얼한 상태에서 혼성 오비탈, 공명, 분자궤도함수까지... 전혀 노베이스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전국의 화학과 교수님들 시련이 벌써부터 눈앞에 훤하다. 물론, 어차피 대학에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다.)
교수님 걱정 전에 당장 현장 교사들도 고민해야할 것이 있다. 전자구름 없이 화학 결합과 분자 구조를 가르치고 학생들을 이해시켜야 한다. 원자가껍질 전자쌍 반발이론은 여전히 2022 화학에도 남아있다. 전자쌍 반발 이론은 전자구름을 풍선에 비유하고, 풍선 공간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공간 배치가 가장 안정적인 형태임을 보여줌으로써 분자의 입체 구조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제 학생들은 전자라는 알맹이 두 개가 모여 있는데, 이들을 왜 풍선에 비유하는지부터 논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졌다. 결국 다른 비유모형을 제시하거나 다른 설명 체계를 찾아야 하는데, 2022 교과서 집필진들이 이를 어떻게 해결했을지도 궁금하다.
한가지 더,
1단원에 있던 몰농도가 4단원 "역동적인 화학반응" 단원으로 옮겨졌다. 4단원에서 아무래도 산-염기 반응과 중화반응에서의 양적관계가 다뤄지고, 중화적정 실험 이전 용액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몰농도를 함께 다루라는 의도인가 싶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것은 3단원이 "화학평형"이라는 것이다. 2022 화학평형은 기존 내용보다 조금 확장되어 2015 화학Ⅱ의 평형상수와 평형 이동 개념이 내려왔다. 그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시기적으로 몰농도 개념을 배우기 전에 학생들은 평형 상수를 먼저 접한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평형상수는 평형 상태에서의 반응물의 몰농도와 생성물의 몰농도를 통해 정의되고, 계산되어진다. 아직 배우지 않은 몰농도 개념을 써서 정의할 수는 없기에 아마도 이를 앞쪽으로 재구성하려는 선생님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교과서가 이러한 위계상 문제점을 고려하여 순서를 재배열해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 교과서 집필은 철저히 교육과정 위계를 기준으로 해야 하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다.)
2.
사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화학의 기본 내용요소가 너무나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들만 몇 가지 끄적이면, 6차 화학Ⅱ 교육과정에서는 탄소화합물과 탄화수소 유도체의 반응이 포함되어 있었다. 2009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화학Ⅰ에서 원소분석법을 통해 화학식을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고, 화학Ⅱ에서는 깁스 자유에너지와 반응의 자발성, 화학반응속도론에서의 1차, 2차, 0차 반응의 특징 등까지도 다뤄졌었다. 분명, 누군가는 분량이 너무 많다고, 지나치게 깊은 내용까지 다룬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적정 선은 학생 수준이 어떤가에 따라, 학생에게 화학이라는 과목이 어떤 의미로 자리하는가에 따라 상대적이다.
2022개정 교육과정의 핵심은 고교학점제이고, 학생 선택이다. 학생이 해당 교과를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학교 현장에서 선택과목 수강신청 시기가 되고, 마감 이후에도 선택과목을 변경할 수 있냐는 문의는 항상 있다. 과목 선택에 자신의 미래의 유불리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오히려 선택권이 학생에게 주어짐에 따라 결정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상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그 교과목을 배워본 경험이 없으며, 정확하게 어떤 교과목인지도 배우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게임에서는 튜토리얼을 해보고, 일정 경험을 통해 캐릭터의 직업을 결정할 수 있지만, 학교에서의 과목 선택은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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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화학이라는 교과목의 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는지 모르겠지만, 2022개정에서는 어쨌든 화학Ⅰ, Ⅱ의 단계형이 아닌, 화학으로 끝맺음할 수 있는 교과목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후 화학 연관 진로 선택 교과를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보다 완성된 한 권의 교과목이 될 수 있도록 생각했어야 한다. 현장에서 교사들이 어떻게 가르칠지, 어떠한 예시를 들어야 할지, 학생들 머릿 속에서 어떤 식으로 개념이 자리 잡고, 재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시수가 줄고, 주어진 시수에 짜 맞추기에 급급한 교육과정을 눈 가리고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 학생들이 이 과목을 선택할 것이고 어떤 학생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며, 어느 수준까지 이 과목을 운영해갈지에 대한 기본적인 아우트 라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교양 수준으로 한번 화학 맛만 봐라."가 콘셉트라면 아직까지 조금 과하고, 관련 분야에 생각이 있어서 대학교 이전 준비 단계로 생각하고 선택한 학생들에게는 내용 요소가 많이 부족하다. 고등학교 시절 화학을 분명 배웠음에도 막상 대학교 1학년에서 처음 일반화학을 접했을 때, 고교 화학과 대학 화학 사이의 큰 괴리감과 어려움을 느낄 듯하다.
아무튼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2022 개정 화학은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서 전혀 신선하지 않고, 흥미롭지 않은 과목이 되어버렸으며, 관련 전공을 가지기 위해 대비하는 마음가짐의 학생들에게도 무언가 채워주기에는 부족한 반쪽짜리 과목처럼 보여 아쉽다.
물론, 교과서가 나오고, 직접 수업을 통해 경험하다보면 나름의 답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걱정이 되는 부분이 크다.